NS 121 시련 속에서 인내를 간직하는 것, 평화 중에서 .
본문
NS 121
성녀 엘리사벳은 시련 속에서 인내를 보였습니다. 묵상 주제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라는 문구를 택했습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인내, 평화!! 배고파 우는 자녀들과 함께 성에서 마을로 쫓기듯 내려올 때,
성녀 엘리사벳은 이 인내와 평화를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나 역시 사랑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처럼 나 또한 세상의 죄를 위한 제물인
어린양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내 결심 : 사랑께서 보내주실 시련 가운데에서 인내를 간직하는 것, 그리고 제물이신 어린양의
봉헌에 한 몫을 차지하기를 평화 중에 원하는 것입니다. (1883년 11월 14일)
영적노트 120, 121, 122 등은 고통 속에서 맛보는 심오한 기쁨을 보여주고 있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이 라파엘
신부의 영적지도 아래 자신의 고통을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 얼마나 프란치스칸적인지(스스로 의식했든 아니든) 다음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완전한 기쁨(프란치스코와 함께 하는 15일기도) - 타데 마투라
수도회의 영적 성공, 선교적 성공, 위대한 인물들의 수도회 합류 등등이 기쁨의 원인은 될 수 없다. 참된 기쁨의 동기라
언급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존재의 어둡고 고통스러운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참된 기쁨과 덕행, 영원의 구원, 그 배경은
그러므로 깊고 어둔 밤, 겨울의 진흙탕 길이다. 이것이 인간 조건의 이미지이다. 인간은 어둠 속에 헤매며 관계가 주는 모든 온기를
박탈당한 채이다. 사건들로 인해 지쳐서 혼자 외로이 참된 기쁨을 찾아 길을 떠난 존재들이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막바지에 이제 주인공은 닿아있다.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알고 있는 형제들이 사는 곳, 낯익고 친숙한 문이다. 진흙 투성이로 온
몸이 얼어붙고 추위에 떨면서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신뢰에 차서 길게 그 문을 두드리고 부른다. ... 형제들은 프란치스코를
나환자와 동일하게 취급했다. 건드릴 수 없는, 제외되고 배제된, 소외된 이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프란치스코는 존재조차 없는
이였다. 이것이 가난과 고독의 가장 밑바닥이다. 참으로 어두운 밤이다.
참된 기쁨과 참된 덕행, 영혼의 구원은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도 인내를 간직하고 동요하지 않는데 있다. 기쁨은 이
시련을 용기있고 인내롭게 견디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승리, 자신의
덕행 말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대응을 의식적으로 거절한다. 그러나 시련 바로 그 자체가(이 일화에서 아주 드라마틱하게
묘사된)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준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 뿌리내리고 있다면, 자신을 둘러싸고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의식하고 있다면 시련은 그 사람을 망치지 못한다. 시련 때문에 비명을 지르거나 울 수도 있지만 그 깊은 곳에는 평화가
깔려있다. 그는 시련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견딜 수 있다. 고통을 견디고 난 다음에 기쁨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련
안에 이미 기쁨이 있어 그 기쁨으로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된다.
“진정 평화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몸과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입니다.(권고 15)”라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참된 기쁨,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가장
심오한 그 기쁨은 고통 속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참된 기쁨은 고뇌와 박해, 부끄러움와 배고픔, 병고와 시련 속에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데서 느끼는 것이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권고 6)”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우리에게 주는 좀 가혹하지만 놀라운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