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 128 겸손은 진리 안에서 가능합니다.
본문
NS 128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하느님의 시선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마리아의 겸손이라는 것을 얼마나 명확하게 이해했는지 신부님은 모르실 것입니다.
겸손은 진리 안에서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겸손은 인간의 우상화를 없앰으로써 사랑과 하느님이 활동하실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빛을 받고 보니 완벽한 겸손이란 하느님의 섭리, 즉 성실하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온전한 의탁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또
이러한 겸손은 영웅적일 정도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전제로 한다는 것도 더 분명히 알겠습니다. 신부님, 사람들은 겸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지요? 세상의 구원은 마리아를 통해 온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랑께서 마리아 안에서는
우상의 의지라는 장애를 만나지 않고서 완벽하게 당신의 뜻을 행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내 결심은 마리아의 자세로 사랑께서
이루시는 고통스러운 활동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참된 겸손의 말씀인 “주님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로 말입니다. (1883년 12월
30일)
자주 나오는 단어에 밑줄을 쳐 보면 이 기도의 핵심이 무엇인지가 금방 드러난다. 즉 겸손이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7번이나 나오면서 마리아의 자세를 요약해 준다.
우선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성모찬가의 한 부분을 가지고 묵상한다. “당신 종의 비천함(겸손)을 돌보셨음이로다.”
이 겸손(비천함, 내가 일부러 낮추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세)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돌아보시게 한 자세이다. 겸손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본다는 의미에서 진리와 통하는데, 이렇게 영혼이
진리(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식하는 것)를 통찰하면 그제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행하실 수가 있다. 그러므로 겸손은
하느님께서 늘, 성실하게(내가 어떤 존재이건,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 섭리에 나를 내맡기는 의탁과
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과 희망과 사랑이 없으면 참된 겸손, 의탁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선교사로서 세상 구원에 협력한다는 의미는 무엇보다 먼저 마리아가 그러하셨듯이 자신 안에 아무런 장애물을 두지 않고서
하느님이 당신 일을 행하시도록 내어드린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태도가 곧 마리아의 “주님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라는 말로
드러난다.
겸손은 그러므로 명철한 자기 인식,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때로는 영웅적인 힘이 필요한) 무조건적인 의탁이자 세상 구원에 협력한다는, 우리 선교사명을 이루는 첫 번째 방법이다.
영성전통에서 “의탁”은 항상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가는 좋은 방법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 와서
의탁 자체가 선교적 의미를 띠고 드러난다. 그에게 하느님과의 일치는 항상 세상 구원을 위한 열망과 이어진다. 이것이 우리 영성의
특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