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 143 내 본성을 떨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본문
NS 143
내 본성을 두려워 떨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건 “교황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겠느냐?”는, 이 두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마치 사랑이신 분이 부드럽게 마리아의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는 대답을 하라고 초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응답을 드리는 것이 한편으로는 아주 감미로웠고, 한편으로는
무서웠습니다. 나는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는 말씀에서 드러나는 “자기 소멸”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곤 무슨
일이 닥칠 지 생각하지 않고 “보십시오,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의
결심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동안 나는 참으로 지상에서 멀어져 있었으며,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우신 동정녀 안에서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이 나를 매료시켰습니다. (1884년 3월 24일)
또 다시, 삶의 재독이다. 1861년 1월 23일 글라라회에서의 그 체험으로 돌아간다. 이 기도를 드리는 시점은
1884년 3월 24일, 에슈바흐 신부가 교황의 명령으로 마리 드 라 빠시옹의 혐의를 검토하던 시기이다. 초기에는 엄격했으나 점차
그 태도가 풀려갔다고 했으니, 이 시기쯤에서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어느 정도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에슈바흐 신부는 3월
29일 모든 조사를 마치고 3월 30일 자신의 조사서를 교황에게 제출했고, 4월 8일 복권이 결정되었다. 삶의 중요한 순간에 늘
그러했듯,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자신의 첫 자리, 첫 성소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향을 재정립한다. 1882년의 이야기보다 더
개인적 감정을 많이 표현한다. 이제 라파엘신부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겠느냐’는 당시의 질문에는 아직 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본성적으로 두렵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동시에 사랑께서 마리아처럼 응답하라는, 즉 마리아의 삶처럼 살아가라는 부드러운 초대이기도
했다.(하긴 마리아가 교회의 전형이요 그리스도신자의 첫째가는 모범이라면 이는 모든 신자들이 받는 초대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마리아처럼 응답을 드리는 것은 한편으로는 감미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서웠다.(이제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이 감미로움과 두려움을 다
체험했다. 앞으로도 더 깊어질 것이지만) 그리고 마리아의 응답이 지닌 의미, 자기 비움(예수님의 자기비움이 구체적으로
표현된)에서 같은 응답, 즉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응답의 결과가 무엇이 될지, 어떤 일이 닥칠지
생각지도 않고 “보십시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십시오.”라고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떠한 유보도, 계산도 없는 “예”는 멋있기는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쉽게 발설하거나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마리 드 라 빠시옹처럼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우신 동정녀 안에서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께
매료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자기비움, 성모님의 자기비움은 모두 사랑의 결과이고, 여기에 매혹될 때, 나 또한 하느님의 계획에
“예” 하기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비울 수 있다. 어제의 묵상에서 나온 표현에 따르면, 이것은 마리 드 라 빠시옹에 대한 하느님의
꿈이요, 하느님께 대한 마리 드 라 빠시옹의 꿈이다. 이런 의미에서 1861년의 사건은 마리 드 라 빠시옹의 “성모영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성모영보 이후 마리아께서 늘 “예”의 여정을 걸어가시고, 마침내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듯, 마리 드 라 빠시옹
역시 이 체험 이후 늘 “예”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영혼들의 어머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