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의 말씀

NS 99 하느님의 겸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작성자 수녀회 조회조회 5,262

본문

NS 99
나의 하느님께서 참으로 아름다우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겸손도!!!
사랑이신 하느님은 피조물 안에서 당신 자신의 모습을 보시고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죄란 영혼이 하느님 밖에서 자신을 보기 위하여 자신의 목적인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 한없는 심연 속으로 떨어진 영혼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께서 “내가 이 심연을 넘어가겠다. 피조물은 더 이상 우리에게로 올 수 없으니 내가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인성을 취하여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면서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겸손되이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또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어머니보다 하느님 안에 자기를 낮추셨던 분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성요셉에 대해서도 묵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성혈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를 씻어주는 세례와 참회는 우리를 자아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성체를 남겨주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비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겸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봅니다!! 그 겸손은 영혼에게 내려온 사랑이었고, 겸손은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기 위해서 자애심을 죽이는 것임을 봅니다.
그때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너에게 오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으니 너도 하느님께 이를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라”는 것이었지요. 동시에(이것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만) 말씀께서 인간에게 오시기 위해서 달리셨던 멀고도 먼 거리를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심, 이 얼마나 깊은 심연입니까? 
또한 피조물이 하느님께로 다시 오르기까지 달려야 할 엄청난 거리도 보았습니다. 신성에 이르기까지 자애심을 비워 가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구속의 피, 그 신성한 불(성령)로써만 이 놀라운 일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흉한 것은 저 자신이 다스리는 것이며, 그 자체로 이미 지옥입니다.  제가 보는 것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정의와 진리는 겸손이며 겸손은 또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입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이시여!” 만약에 내가 겸손했더라면 나는 십자가 위에서 더욱 평온했을까요? “하느님께서 커지시고 저는 작아지게 하소서.” 겸손은 자기 뜻을 아무 것도 갖지 않으며, 사랑이 나를 부수도록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1883년 8월 14일)

1) 단락 나누기
  I. 하느님의 신비
    -창조: 하느님은 피조물 안에서 당신 자신을 다시보기 위하여 창조하셨다.
    -죄: 죄란 피조물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위하여 자신의 목적인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죄란 ‘무엇을 바라보는지-갈망하는지-’의 문제이다.
      이 죄의 결과로 인간은 심연에 떨어졌고, 하느님께로 다시 올라갈 능력을 잃어버렸다.
    -육화(필리비서 2,6-11): 말씀이 말씀하신다. “이 거리를 건널 사람은 바로 나라고.” 이렇게 육화 덕분에 인류 가운데 사랑이 돌아왔다.
    -구속: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분이 하느님 안에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신다.
    -마리아와 요셉: 예수님 다음으로 하느님 안에 비우고 낮추신 분은 마리아이시다. 덕분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모실 수 있었다.(요셉도 그러하다.)
    -성사: 세례, 화해, 성체성사-우리를 씻어주고, 하느님 안에 우리 자신을 비우게 해준다.
II 이 신비가 영혼에게 실현되기 위하여: 겸손
    -겸손: 영혼에 사랑을 돌려주는 것.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기 우하여 자애심을 죽이는 것. 이것이 정의요 진리이다.
    -하느님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춤: 인간과 하느님을 만나게 해준 하느님의 겸손과 같이 우리 역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출 필요가 있다.
  - 결심: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사랑께서 하시도록(무엇이든지) 내어맡기는 것.(순응성의 의미)

2) 자주 나오는 단어
<바라보다, 보다>
창조: 하느님께서는 피조물 안에서 당신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시고자 인간을 창조하셨다.
죄:영혼이 하느님 밖에서 자신을 보기 위하여 자신의 목적인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 하느님의, 하느님을 향한 시선은 생명을 주는 창조를 낳았으며, 인간의, 자신을 향한 시선은 죄를 낳았다. 이것이 창립자가 보는 창조와 원죄의 이해이다.(요한복음에서 말씀은 “하느님을 향하는 존재(tourne vers Dieu)”라고 정의된다. 성부만 바라보고, 향해 있는 존재인 것이다.)
<떨어지다/올라가다; 오다/가다/달려간다... 등의 동사>
피조물이 죄 때문에 심연으로 떨어진다. 피조물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께 도로 올라갈 수가 없다.
말씀이 이 거리를 건너겠다고 말씀하신다. 피조물이 우리에게(삼위일체께) 올 수 없으므로, 내(말씀)가 피조물에게 간다. 육화로 인해 인류 안에 사랑이 다시 왔다.
인류와 하느님과의 거리를 말씀이 인류에게 오기 위하여 달려오는데, 이는 인류가 하느님께로 다시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느님께로 다시 오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오시는 쪽은 늘 하느님이시다.
<거리, 심연>
이 거리는 죄로 인해 생겨났다. 인류는 심연 속에 떨어져서 건널 수가 없다. 그래서 말씀이 자신을 낮추시고 오셨다. 하느님이 이토록 자신을 낮추셨기에 인류 역시 하느님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참된 의미이다. 그러나 이 거리를 건널 수 있는 것은 구속의 피요, 그분 거룩하신 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낮춤/겸손>
겸손은 영혼 안에 이 구원을 실현시키는 자세이다. 그것은 영혼에게 사랑을 돌려주며,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애심을 죽이는 자세이다. 사실 이 겸손의 근원이자 모범은 육화에 있다. 하느님이 자신을 낮추셨기에 우리도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은 정의요, 진리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는 이 겸손이 있다면 삶의 십자가 앞에서 좀 더 차분해질 것이며, 하느님이 커지시고, 내가 작아져야 한다고 말씀드릴 것이며, 자신의 의지를 고집하지 않고 사랑께서 내 안에 자애심을 없애시도록 맡겨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