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의 말씀

NS 95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작성자 수녀회 조회조회 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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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 95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성아우구스티노의 천사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신부님, 성인의 지성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기보다 바닷물을 작은 웅덩이에 다 담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내가 사랑을 더 품으면 품을수록 사랑을 담을 수 없는 나의 무능력함을 더 잘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나는 더욱 더 사랑에 목이 마릅니다. 오, 순교와 같은 고통! 예수님, 이웃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보면 볼수록 이웃을 위하여 그분의 애덕에 목이 마릅니다. 이 애덕이야말로 신적인 애덕입니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아우구스티누스의 웅덩이가 됩니다. 갈망으로 미칠 듯하게 만드는 이 애덕을 나라는 웅덩이에 다 담을 수 있기보다는 차라리 바다를 다 퍼 올릴 것입니다. 신부님, 이 천국을 열렬히 그리워하며 특히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의 뜻이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 영혼 안에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여기 이 지상에서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여기에는 사랑이 너무 적습니다.” (1883년 8월 8일)

- “담다”는 단어가 여러 맥락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 성인이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기보다는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 내가 사랑을 품을수록(같은 단어), 더욱 더 사랑을 담을 수 없는 내 무능력함을 깨닫는다.
    - 이 애덕을 다 담을 수 있기에 이르기보다는 바닷물을 다 퍼올릴 것이다.
    이 때 ‘담다’라는 말은 사랑을 이해하다, 사랑을 품다, 사랑으로 변모되다는 뜻으로 쓰인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사랑하고 싶은 갈망을 커지고, 절대적인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래도 더 갈증에 타는.... 하느님을 만난 이의, 사랑에 대한 무한한 갈망을 읽을 수 있다.   

- 목마르다, 갈망하다, 원하다, 부르짖다... 모두 갈망을 드러내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만 따로 색칠해 본다면 이 기도 중에 마리 드 라 빠시옹이 느꼈던 갈망이 얼마나 강한지를 한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토록 갈망하는 대상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같은 무한한 사랑이기에 그 앞에 서 있는 인간은 자신을 한갓 작은 웅덩이라고 느끼며, 이 간격 때문에 순교와 같은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고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이 사랑을 미칠 듯 갈망한다.

-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있는 곳, 그 사랑을 품는 상태가 곧 천국이다. 이 천국을 어느 정도 맛본 이는 더욱 더 이를 갈망하는데, 이 갈망은 ‘하늘’과 대비되는 ‘이 땅’에 얼마나 사랑이 없는지를 볼 때 더욱 더 커진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사랑에 불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 척박한 세상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