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의 말씀

예수님이 내 영혼 앞에서 변모하십니다.

작성자 수녀회 조회조회 5,242

본문

NS 44, NS 45
    내 영혼은 (모든 관상하는 영혼들과 함께) 성령께 인도되어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곳에 머물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하나의 커다란 은총입니다. 관상하는 영혼은 벌써 이 세상보다 더 높은 곳에 있으면서 세상을 지배하고, 이 높은 데에서 예수님과, 그분이 선택하신 제자들과 함께 있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이 행복에 대해 자신의 의지가 큰 역할을 합니다. 영혼은 스스로 걷습니다. 그분의 인도를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혼 스스로도 도와야 합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영혼 앞에서 변모하십니다. 사랑의 놀라운 일들이 시작되고, “그분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며 그분의 의복은 눈과 같이 하얘집니다.”(마태 17,2) 우리를 위하여 육화 하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예수님께서 당신의 진리와 사랑을 빛나고 순수한 방식으로 제 영혼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총에 대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보지만 다른 모든 영혼들이 보는 예수님이 아니라 변모하신 나의 예수님을 봅니다.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빛나고 명철하게 나를 꿰뚫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보는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나는 모세가 율법의 아름다움이라 깨닫습니다. 또 엘리야는 이 지상에 머물지 않고 살 수 있는 경지에까지 갈 수 있는 수도적 영혼의 완덕입니다.
내 하느님께서, 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복음에서 말하고 있듯이 나를 덮어주시며,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는 내 마음 흐뭇한 사랑을 그이 안에서 보며 앞으로도 볼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신 분은 분명히 신적인 구름, 즉 나의 아름다운 삼위일체이셨습니다. 이때 이미 취해있던 내 영혼은 더더욱 도취됩니다. 언제나 자연스럽게 하느님께로 향하는 영혼의 행복, 이렇게 거의 자신의 궁극적 목적에서 누리는 기쁨을 누리는 영혼의 행복을 말로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원죄로 인해 죄에 물든 우리 육신과, 그 흔적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우리 본성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립니다. 자, 이것이 어제 신부님께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제자들은 자신들이 본 것들을 하나도 놓쳐버리고 싶지 않았겠지만, 그들의 본성은 너무나 나약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 가까이 다가오시어 그들을 건드리시면서 “두려워 마라”고 말씀해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본성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보통을 뛰어넘는 이러한 은총을 받고 나면, 순명은 어떤 의미로, 필수가 됩니다. 순명은 지각할 수 있는 예수님이라 하겠습니다. 구름에 덮여, 눈같이 희고 눈부신 광채 앞에 서 있는 영혼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해줄 필요가 얼마나 절실한지 신부님은 모르실 것입니다.
    영혼은 이를 통하여 또 다른 산, 즉 갈바리산을 미리 예감합니다. 이 산은 갈바리산으로 가는 통로이니까요. 베드로는 그 산에서 스승을 배반했으니, 어찌 다볼산에서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묵상 중에서 제가 본 또 다른 빛.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기 전에는 오늘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 영혼은 스스로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을 뵌 영혼들에게 말고는 이 놀라운  광경에 대해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내 가련한 지성이 목격한 이 놀라운 광경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우리 주님께서는 엄하게 당부하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신부님, 이런 것들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불편합니다. 너무나 밝고 명철한 가운데 진리와 애덕의 영상을 보는 것, 특히 신적인 구름 속에 머무르는 것은 영혼을 하느님과 통교하게 하고, 그 무엇보다 더 신속하게 한 영혼 안에서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을 생겨나게 합니다. 그래서 영혼은 이 불을 전달해 줄 만한 차가운 것을 찾거나, 아니면 그 영혼을 사르는 불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신과 비슷하거나 혹은 더 뜨거운 영혼을 찾게 됩니다. 만약 이 불을 뿜어 내지 못하고 자기 안에만 가둬둔다면 그는 산 채로 태워지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영혼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산을 오를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이제 이러한 은총을 받은 후 산에서 내려올 때 그들에게는 지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영혼 역시 지도를 받을 필요성을 절실히 느낍니다.
 이 복음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근거로 사용하기에 “성녀 데레사의 우물들”보다 훨씬 낫겠습니다. 이것을 쓰신 분은 하느님 바로 자신이시니 말입니다.    (1883년 2월 17일)



1. 단락 나누기
1) 단락
성령에 인도되어, 예수님께 인도되어 두 단어 모두 주 역할은 하느님께 있지만 영혼 역시 자신의 의지로 혼자 걸으며 은총에 협력해야 한다. 관상하는 영혼들은 높은 산에 머무르며, 예수님과, 그가 선택한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세상보다 훨씬 높이 있으면서 세상을 지배한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다.
2) 단락
이 관상 중에 예수님의 변모를 본다. 그것은 “빛나고 순수한 진리와 사랑”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은총으로, 내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서 예수님은 변모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육화하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3)단락
나는 변모하신 예수님을 본다.
나는 삼위일체께서 “그의 말을 들어라”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그래서 이미 취해 있던 내 영혼은 더더욱 도취된다.
자신의 궁극적 목적에서 기쁨을 누리는 행복을 느낀다. “나”가 주어인 것은 모두 수동적이다. 나는 보고, 듣고, 도취되고 기쁨에 찬 행복을 누릴 뿐이다.
대신 예수님은 변모하시고, 그의 사랑과 진리로 ‘나’를 꿰뚫고, ‘내’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시며, 삼위일체이신 신적 구름은 ‘나’를 덮어주시며, ‘내’게 말씀하시면서 영혼을 취하게 하신다.
4)단락
- 이런 은총에 대해 원죄에 물든 우리 본성은 두려움을 느낀다. 제자들 역시 그러했으며, 그래서 예수님이 “두려워말라”고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 은총은 본성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는 형태로 예수님의 뜻을 말해줄 순명(오늘날의 영적지도자)의 필요성을 느낀다.(다시, 영적지도자인 라파엘 신부의 존재에 대해 감사를 느끼고 있다.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 라파엘 신부는 “지각할 수 있는 예수님”이었다.)
영혼은 이 타볼 산에서 또 다른 산, 갈바리를 예감한다. 자신의 약함을 잘 아는 영혼은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떤다.
- 예외적인 하느님 체험을 한 사람은 그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5)단락
이러한 체험, 즉 -진리와 애덕의 영상을 명철히 꿰뚫어 보고, - 신적인 구름 속에 머무르는 체험은 일상적이 아니므로 영혼을 흔들어놓는다. 그러나 이 체험은 하느님과 영혼을 통교하게 해주고, 영혼 안에 불이 타오르게 한다. 이 불이 너무나 맹렬해서 더 뜨거운 불을 찾거나, 불을 내어 놓아야 한다.
다시, 영적지도를 받을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이 체험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2. 등장인물
 - 내 영혼 : 내 영혼은 관상하는 영혼이다. 성령이 그를 은총으로 인도하여 세상 보다 훨씬 높게 머물며, 세상을 지배하며, 예수와 그 제자들의 동료가 된다. 내 영혼이 겪고 보는 모든 단어들은 수동태이다. “보여지고, 도취되고, 뒤덮여지고...” 영적 체험은 철저히 수동적이다. 은총은 구걸하듯 청하고, 구걸하듯 받을 수만 있다.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다. 그에 비해 두려워하고, 순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지도를 받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등의, 능동적 단어는 우리가 은총에 대해 어떻게 협력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의 영적체험이 얼마나 성경에 바탕을 둔, 건전한 것인지를 잘 볼 수 있다.

 - 성령 : 성령은 관상하는 영혼을 높은 산위로 인도하신다. 관상은 근본적으로 성령의 작용이다.
    예수님은 영혼을 동반하시고, 변모를 통해 당신 자신의 참 정체를 보여주시고, 당신 사랑과 진리를 이해하도록 해주시며 내 영혼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시며(즉 구약을 이해하게 하시며) 제자들에게 가시어 그들을 건드리시며, “두려워 마라”고 말해주시며, 받은 은총에 대해 침묵하라고 가르치신다.
    하느님은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고 말씀하신다.
    신적인 구름, 나의 아름다운 삼위일체가 나를 덮는다.
    사실 성부와 성자, 성령의 하느님 체험은 이미지를 사용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여기서는 “구름”, 즉 하느님 현존의 강렬한 체험으로 형상화된다.

- 대부분의 사람 : 내 영혼(관상하는 영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지만, 나에게(그리고 관상하는 영혼, 선택된 이들) 예수님은 자신이 참으로 누구이신지, 즉 변모하신 예수님을 보여주신다. 사랑의 놀라운 일이 시작되고 예수님은 당신 사랑과 진리를 보여주시며, 당신 사랑과 진리가 나를 꿰뚫는다.(그리하여 나를 변모시킨다.)-관상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3. 장소
 - 높은 산 :
올라감 : 성령께, 예수님께 인도되어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데, 영혼의 의지도 여기에 협력해야 한다.
높은 산에서 일어나는 것 : 변모하시는 예수님께서 당신 사랑과 진리를 보여주시고, 당신 자신 변모 하시고, 당신 사랑과 진리가 나를 꿰뚫으시고, 신적 구름이 나를 뒤덮는다. 그에 대해서 나는 “술에 취하듯 도취”되며 두려워하며, 또 다른 산, 즉 갈바리 산의 수난을 예감하고 두려워한다. 이 모든 일이 이 “높은 산”에서 일어나는데, 성경 전통에서 산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일어나는 곳,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 이 산은 참된 예수님을 알게 되는 곳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 갈바리의 의미도 이해한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도 누린다. 
내려옴 : 영적지도를 받을 필요성, 은총에 대해 침묵할 필요성을 재확인한다.


4. 자주 나오는 단어
- 인도되다 ;  “인도되다”는 말은 성령께, 그리고 예수께 인도되는 것으로 두 번만 나오나, 순명(영적지도)의 필요성, 지도를 받을 필요성을 말하는 것까지 하면 6번이 언급된다. 영적지도가 영성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지도의 목적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 머물며, 거기서 비할 데 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 두려움이란 단어가 3번, 두려워하지 말라도 3번 나온다. 인간은 죄에 물든 본성 때문에, 희고 눈부신 구름 앞에, 즉 자신을 뛰어넘는 신비 앞에 서 있기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체험한 후 영혼 안에 맹렬한 불이 일어나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므로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첫 두려워 마라는 말씀은 예수님 친히 해주신다. 죄에 대한 용서와 사랑 체험인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두려워 마라는 말은 영적 여정을 걷는데 필요한 지혜와 식별에 관한 것이므로, 순명, 영적 지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 어느 것이든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는 “예수님의 말을 듣는” 행위이다.

-  빛나고 명철하다, 빛나고 순수한 방식으로, 눈같이 희고 눈부신 광채 앞에 서 있다.(빛, 순수함, 명철함, 눈부심) 이 모두가 이 관상 중에 체험한 것들이 아주 명백하고 분명함을 알려준다. 예수님의 신비를 “보았지만” 지적인 작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적인 깨달음으로 “본” 것을 표현하자니 이러한 단어들이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5. 어떤 영적 체험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결국 이 기도는 표현할 수 없는, 아주 강렬한 영적 체험이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더 잘 알게 되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깊은 행복을 맛본다. 이는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과 마리 드 라 빠시옹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을 통해 알게 되는 직관적 지식이다.

  이 관상의 체험이 얼마나 강했던지 “프란치스칸 전례 묵상집”에서 이 체험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묵상집 8월 6일, 우리 주님의 변모 축일과 사순 제2일 묵상에서 같은 복음이 나온다. 이 텍스트 마지막에 이 복음에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성녀 데레사의 우물”보다 더 잘 찾아볼 수 있다고 했듯이, 묵상집에서 그는 자매들에게 기도와 영성생활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묵상집이 1889년에서 1897년 사이에 쓰여졌고, 특히 사순2주일 복음이 나오는 제5권은 1896년에 작성되었으니 이 텍스트와 묵상집의 텍스트를 비교하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1882년 2월, 이 관상을 경험한 후, 그는 총장직에서 면직 당하는 큰 시련을 겪었고, 번성하는 선교 수도회의 총장으로서 양성과 영성과 선교에 대한 경험을 많이 한다. 묵상집에서 같은 복음을 해설하면서 그는 자신의 기도 체험에다 이런 풍부한 경험을 적용하여 영성대가로서의 훌륭한 가르침을 남기고 있다. 직접 비교하면 더 풍부하겠지만 몇 가지 점만 나열하는데 만족하기로 하자.
1883년 2월(원체험)                        경험                            묵상집
스스로 두려워 함.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
수난을 예감함                                            일어나라, 견고히 서고, 신뢰를 가지라.
지도를 받을 필요성                                    두려움 없이 온전히 의탁하면서 자신을 비워라. 그러                                                        면 반드시 예수님의 변모에 참여할 것이다.

6. 참고 사항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기도의 여정을 정원에 물을 주는 네 가지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관상을 시작하는 이는 잡초에 뒤덮인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하느님이 친히 잡초를 뽑아주신다. 인간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식물을 가꾸고, 물을 주어야 한다. 물을 주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아주 힘들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한다. 두 번째는 양수기와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물을 긷는 것이다. 인간은 덜 피곤하고 더 많은 물을 얻을 수 있다. 세 번째는 강이나 냇물에서 물을 끌어오는 방법도 있다. 더 풍부하게 물을 줄 수 있으면서도 정원사는 훨씬 더 편하다. 마지막은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이다. 다른 방법과 비교할 수도 없는 이 방법은, 주님께서 친히 하시므로, 우리 편에서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