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자타 연못가의 병자 치유
본문
NS 43
(요한 5,1 - 14: 벳자타 못가의 병자에 관해서)
나는 중한 병을 앓고 있는 이 가엾은 세상을 보았습니다. 진리와 애덕이신 하느님의 성혈에 잠기게 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이 세상은 더욱 불쌍합니다. 나는 두 가지 측면을 보았습니다. 한 쪽은 사도직과 화해성사를 통해 일부 영혼들을 구원한 몇몇
사제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 세상의 대부분은 도와줄 아무도 없이 들 것에 누워 있습니다. 이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보통 이상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세상을 향해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일어나서 걷기 시작할 것이고 몇몇 바리사이파들에게 자신을 보여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만, 어쨌든 그는 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은총을 얻으려면 그분은 어떤
사랑을 원하실까요? 너무나 가혹하게 다가오는 이 상황에서, 나는 내게 아주 소중한 이의 죽음을 봉헌했습니다. 이제 가족 중에
마지막으로 남은 나는 사랑하는 여섯 사람의 무덤 가운데 서서, 내가 더 이상 예수님 외의 누구의 것일 수도 없음을, 그분을 위한,
교회의 제물이자 프란치스칸 제병임을 느꼈습니다. (1883년 2월 16일)
1)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의 이야기는
1) 치유 2) 유대인과의 토의 3)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계시로 나누어진다.
보다 깊이있게 이해하기 위하여 이 복음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야기의 시작 : 그 뒤에(예수님이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두 번째 표징을 보이신 후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거기에 38년간이나 앓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야기의 마침 : 그 사람은 자신을 건강하게 해준 사람이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야기의 시작과 마침 사이에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 일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친 예수님의 행위이다.
2) 장소 :
예루살렘 :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못 : 벳자타 못이라고 불리는 못이다. 여기에 많은 병자들이(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소외된 이들) 머물고 있었다.
성전 :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벳자타 못으로 인해 치유를 받은 사람을 만나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타이르신다.
텍스트 자체는 죄와 병 사이의 관계를 단정 짓지 않지만 여기서 예수님의 활동은 신체적 치유로만 그치지 않음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이 사람은 앞으로 자신이 받은 선물에 합당하게 살아갈 것이다.
성전은 또한 유대인과 예수님, 병이 나은 이와 유대인 사이에서 토론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즉 기존 전통, 율법과 새로운 계약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는 곳이다.
3) 인물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
예수님 :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병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다./군중이
몰리자 몰래 자리를 뜨시다/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시다/병자에게 하신 말씀-낫기를 원하느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유대인들에게 하신 대답-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계시한다. 팔레스타인 랍비들은 일곱째 날에 마친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과(창세2,2) 마지막 심판으로 인간 세계가 완성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을 구분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활동을 성부의 이 창조적 활동과 같은 것으로 두고 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한 이유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 사람의
치유는 인간의 궁극적 완성을 위한 하느님의 창조 행위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활동은 육화를 연상시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고, 가난한 이들 한가운데에 가시고, 그들을 치유하여 구원 역사 안으로 통합시키고 계시다.
많은 병자들(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들)
그곳에 몰려 있는 군중들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 : 이름이 없다. 병자들, 배척받은 이들의 대표자라 하겠다. 그는 낫기를 원하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상황, 즉 아무도 없는 고립된 상태, 그래서 다른 이가 먼저 내려가는, 경쟁에서 뒤쳐진 상태에 대해
하소연한다. 고립되고,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의 대표자이기도 하겠다. 그는 병이 나아, 예수가 말씀하신대로 들것을 들고 걸어가고,
유대인들과 대등하게 답을 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낫게 해주신 분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예수님을 알게 된 후 그것을 유대인에게
말하여 예수님과 유대인의 충돌과, 그 결과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를 끌어낼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는 사라진다. 그의
치유는 그러므로 육신의 치유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되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하는 증거자가 되었다.
유대인들 : 유대인들은 후반부에만 나타난다. 이날은 안식일이어서 안식일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박해하기 시작한 그들이 예수님이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계시하시자 그를 죽이려 한다. 이
논쟁은 이어지는 19-30절의, 아들의 권한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법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관의 문제였던 것이다.
4) 다음 텍스트와의 관계
아드님의 권한 -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시고, 심판하는 일도 넘기시며 아들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으며, 심판하는 권한도 주셨다. 아들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며, 오직 아들을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할 따름이다.
2) 이 가엾은 세상 : 병자는 “이 가엾은 세상”의 대표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와 애덕이라는 하느님의 성혈”의 못에
담가줄 사람이(사제들)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세상은 이렇게 고립된 채 들것에 누워있다.(자유를 빼앗긴 채)
3) 예수께서 말씀해주셔야만 합니다. : 이 병든 세상은 예수님의 직접 개입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세상을 낫게 하고, 일어나게 하며, 마침내 걸을 수 있게 해줄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그것을 청해야 한다.
4)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 세상을 낫게 해주실 은총을 청하기 위하여 자신의 역할을 찾던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사랑을 다하여 자신의 상황, 자신의 고통(오빠 샤를르 드 샤뽀땡의 죽음)을 봉헌한다.
5) 1883년 2월 초, 오빠 샤를르의 죽음으로 마리 드 라 빠시옹의 친형제는 모두 돌아가셨다. 여섯 무덤이란 아마도
부모님, 마르틴, 루이즈, 루이즈의 아이, 샤를르의 무덤일 것이다. 이 절대적인 고독 앞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이 온전히
예수님만의 것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그분을 위한 교회의 제물이자, 프란치스칸 제병이 된 것처럼 느낀다. 프란치스칸 제병은 보통
기쁨과 연관있지만 여기서는 절대적 가난이 프란치스칸과 제물을 연결시키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