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본문
NS 47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내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나는 십자가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땅에서 높이 들어 올려지는 것. 이 복음이 의미하는 바 전체가 내게 보여졌습니다.
십자가는 높은 데서 오는 모든 이들의 몫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진리와 애덕으로 들어올려줍니다. 십자가 자체가 우리를 이 땅과
분리시켜 주기 때문이지요. 십자가는 다른 누구보다 더 예수님을 사로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요, 우리를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려고 사랑으로 육화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속해 있으셨습니다.
나는 오늘 복음은 아니지만 그 다음 구절까지 다 읽었는데, 그 마지막 말씀은 내게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말씀드리지요.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자주 “충실하십시오.”라고 되풀이하신 것이 얼마나 옳았는지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깨달았습니다. 만일
내가 항상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만 한다면 나는 절대로 혼자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1883년 2월 19일)
1) TOB- 십자가에 올려지면서 예수님은 또한 영광으로 올려질 것이며, 그분의 신적인 정체성과 그분 말씀의 진리가 모든 이에게 드러날 것이다.
요한복음 3,14-15에 역시 들어 올려진다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에서 역시 십자가에 달림이 영광으로 현양되는 사건과 같은
사건으로 묘사되고 있다. 요한복음 12, 32-34절 역시 땅에서 들어올려질 때 모든 이를 예수 자신께로 이끌어 들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십자가에서의 현양은 영광중의 현양의 수단이자 방법인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예수님 자신을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1,14) 이 영광은 천지 창조 이전에 예수님이 누리던 것으로(17,5), 이미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당신 활동과 말씀으로 드러난 것이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가장 극적인 순간은 죽음과 부활이다. 이를
예수님은 “들어올려지다, 현양되다” 등의 단어로 여러 번 언급하신다. 이 순간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에게로 흘러들며, 아들의 영광
또한 아버지께로 흘러간다.
2) 십자가의 신비는 높은데서 오는 이들의 몫이며, 그들을 이 땅과 분리시켜 땅에서 높이 들어올린다. 이 높이 들어올림은
진리와 애덕 안에서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올려지는 것은 우리가 진리와 애덕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십자가는 무엇보다 앞서 예수님의 것이었다. 그분이 진리와 애덕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사랑으로 육화하신 분이시기에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는 다른 이를 사랑으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도 사랑의 육화가 된다는 말이다.
3) 십자가의 신비 : 연상되는 성경구절이 요한 17,14-19이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TOB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까이 다가온 종말의 때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이 말씀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세상 한 가운데에서 종말적 세상을 증거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 의무는 당연하게 공동체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악과 증오의 세력에 맞서게 한다. 공동체는 하느님의 도움으로만 이 악과 증오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육화하신 말씀이 드러내 보여주신 하느님의 진리로 축성되어야 한다. 이 축성의 힘으로만 제자들은 이 세상에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축성으로 따로 떼어내어졌기에 제자들은 세상과 다른 태도로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모시고 가도록 파견될 수 있다. (이렇게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존재 전체로 하느님께 속하는 그만큼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 속하는 것, 그리고 세상에 진리를
증거하는 것은 죽음의 봉헌에까지 이를 수 있다. 이 희생적 측면은 이 복음구절 다음에 바로 수난이 나오므로 더 더욱 강조된다.
“이들을 위하여”라는 말을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축성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자유롭게 바치려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이 비록 이 복음구절을 인용하고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의 이 묵상이 예수님과 같은 영적 움직임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복음이 마리 드 라 빠시옹의 텍스트를 밝혀주고, 마리 드 라 빠시옹의 텍스트를 통해 fmm으로서
어떻게 복음을 생활할지에 대한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대표적 예이다.
4) 다시 태어나다는 뜻은 여기서 진리와 사랑 안에 살아간다는 것, 지상에서 떨어져서 진리와 사랑 안에서 들어올려진다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누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다른 이를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 사랑이 된다는 말이다.
5) TOB-구약에서 하느님이 사명을 맡기신 이들에게 어떻게 힘이 되어주시고, 함께 계시는지를 계시하신 부분(출애
3,12; 여호 1,5;1사무 10,7;예레 1,8;아모5,14)을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다. 실상 예수께서는 자신의 온
존재를 하느님을 섬기는데 내어놓고 계신다.(요한 4,34-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요한 5,30-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6,38-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6)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신앙 안에서 성찰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진리와 애덕 안에서 살기
때문에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임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는
한, 즉 진리와 애덕 안에 머물러 있는 한 하느님께서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임을 확신하고 위안을 얻는다. 십자가가 느껴지든
말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