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 51 원죄 없는 인류와 하느님의 일치
본문
NS 51
나의 아름다운, 복음을 든 동정녀를 떠올리면서 그건 곧 세상에 복음을 건네주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이시라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원죄가 없는 인류와 하느님의 일치를 다시 한 번 보았는데, 이 원죄 없으신 잉태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요!
원죄 없으신 잉태로 인해 마리아만이 아니라 성요아킴과 성안나도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죄가
아니었다면 인류는 창조주를 위한 사랑으로 이루어졌을 텐데요.
우상과 자아가 단 하나뿐인 사랑의 자리를 차지한 이래, 인류 역사에는 분리가 있어왔습니다. 더 이상 인류를 움직이는 것이
창조주의 사랑이 아니라(참으로 그래야 마땅한데!) 자아에 대한 경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얼마나 밝은 빛으로
보았는지 도저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느님보다 더 많이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성요아킴과 성안나는 갈림
없는 하느님에 대한 단 하나의 사랑 안에서 어머니요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만, 그래도 이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나는 또 성요아킴보다 더 아름다운 성요셉을 보았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가장 아름다우신 마리아가 성요셉께 속해 있고,
성요셉 자신도 너무나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 그가 품은 동정녀께 대한 사랑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하는 그런 방식의 사랑이었습니다. 신랑과 동정녀, 성요셉은 이것을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찾았습니다. 성요셉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이건 정말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치를 너무나 목말라 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 둘이 모인다면, 그들은 내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마태
18, 19-20 참조).” 내 마음과 내 본성이 나자렛에서 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지상과는 다르며, 그리고 사람들이 일컫는 애정이라는 것과도 전혀 다릅니다. 밤과 낮이 다른 것, 그
이상으로요.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영혼들을 만나는 것, 그것은 천국입니다! (1883년 2월 27일)
- 원죄 없으신 잉태 : 원죄 없으신 잉태는 단순히 마리아에 해당되는 신앙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원죄가 없이 하느님과
결합된 인류”의 모습이자 “창조주를 위하여 사랑으로 이루어질 인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모습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에게서
집약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 동정녀는 세상에 복음을 전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동정녀 다음으로 성요아킴, 성안나 무엇보다
성요셉이 이 새로운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그러니까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성인들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1) 하느님께 대한 나뉨 없는 사랑으로, 2)인간적인(세상적인)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듯이
사랑함으로써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며, 정배가 된다. 성요셉은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느님의 방식으로 성마리아를 사랑하셨기에
정배인 동시에 동정녀로서 마리아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사랑(세상 방식과 대비되는)이 구현된 곳은 나자렛이다.
거기에 하느님과의 일치가 있고, 그 안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즉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영혼과 이루는 만남이 있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의, 성모 신비에 대한 명철한 이해를 보며,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어떻게 인간의 사랑과 만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 ‘이건 정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것들을 얼마나 밝은 빛으로 보았는지 도저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등등의 말이 이 기도의 기록 중에
마리 드 라 빠시옹이 하느님의 빛으로 조명을 받아 어떤 진리를 깨우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죄 : 죄는 이 기도에서 하느님이 아닌 우상, 그리고 자아가 사랑의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분리를
낳고, 하느님께 돌려야 할 경배를 자아에게로 돌려서 사람이 당연히 되어야 하는 바, 즉 창조주를 위하여, 창조주와 일치하는
상태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제대로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애정’에만 매달리게 된다. 죄를 벗어버린
새로운 인류는 사랑을 통해서 탄생할 것이다.
- 성경구절 : 마태 18,19-20 :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공동체의 분리를 경고하시는 말씀이다. 맥락은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이 유일한 회중으로 모인
교회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당신 이름으로 드리는 모든 기도에 현존하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지만, 또한 교회 한 가운데에서
형제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화해와 상호교정의 노력을 격려하면서 거기에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TOB).
이렇게 성경구절을 이해하고 보면, 이 기도문의 또 다른 주제가 떠오른다. 즉 일치가 그것이다. 일치는 사람들 사이의
‘애정’이라는 부르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일치는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비롯하며, 그렇게 이루어내는 일치는
이미 지상에서 천국이라 할만한 것이다.(그 반대로, 죄는 하느님과의 분리를 가져오고, 그러므로 인간들 사이의 분리도 가져오므로
하느님 없이 참된 의미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원죄 없으신 잉태 신비와 공동체의 일치를 연결해내는 직관이 놀랍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