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의 말씀

NS 100 가련한 나여! 성체, 사랑이 되도록 너 자신을 비워라!

작성자 수녀회 조회조회 5,105

본문

NS 100
성체는 ‘내’가 되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신 ‘신적인 나’이다. 가련한, 너무나 가련한 ‘나’여! 성체, 사랑이 되도록 너 자신을 비워라.
나는 언제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굴욕을 당하고, 소멸될 각오가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내 사랑을 성장시키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이것이 내 사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건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신부님. 이러한 관상이 가져오는 결과를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이 단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얼마나 자신을 비워야만 하는지를 본 이상, 어떻게 자신을 비우고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하여 육화하신 말씀의 그 한계를 모르는 사랑 앞에서 이토록 조금만 자신을 비우는, 혹은 조금도 자신을 비우지 않는 피조물과 사탄을 보면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우리 죄를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말하자면, 이 아름다운 진리라는 보물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 놓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생명의 샘물을 마십니까? 사람들은 자아를, 혹은 금을 그러니까 죽음을 마십니다. 나는 온유한 겸손의 그 극치에까지 가기를 원하시는 이 사랑의 자기 소멸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소멸하는 사랑은 구유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시며 감실에서 영예롭게 되십니다. 온유함이시여! 겸손이시여! (1883년 8월 15일) 

 “나”: 하느님은 (거룩한) ‘내’가 되기 위하여 자연적인 ‘나’가 되셨다. ‘나’는 하느님처럼 나 자신을 비우고서 거룩한 나, 즉 성체요 사랑이 될 수 있다.  항상 십자가에 못 박히고 굴욕을 당하고 자신을 비울 준비가 되는 것이 이 변모의 방법이다. 이러한 진리는 거저주는 선물처럼 모든 이에게 열려 있지만 사람들은 이 생명의 샘물에서 물을 마시기보다는 ‘나(자아)’를 마시거나, 혹은 금(돈)을 탐한다. 자기비움의 길이 생명으로 이끄는데 비해서 자아를 채우거나 금을 따르는 길은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데도 말이다. 여기서 자기 비움의 방법으로 제시된 십자가, 굴욕 등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 보다는 변모를 향한 길이라는 데서 그 충만한 의미를 지닌다.

“관상” : 마리 드 라 빠시옹은 무엇을 관상했기에, 관상의 결과로 무엇을 느꼈기에 죽음만이 자신을 진정시켜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창립자는 그것을 표현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말은 한계가 있다.

   관상한 바-
1) 성체는 내가 되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신 하느님, 인간 역시 자기비움을 통해 하느님,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것.
2)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굴욕을 당하고, 자기를 비우는 것 등은 모두 사랑(내 사랑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이 성장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
3) 온유한 겸손의 그 극치에까지 가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자기비움(자기비움의 세 장소:구유, 십자가, 감실)

   관상한 바에 대한 마리 드 라 빠시옹의 반응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아름답다. 죽음만이 잠재울 수 있는 열정이 일어난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탄하고, 그에 대해 강한 열정이 일어나고 있다. 그가 참으로 관상 중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 관상의 결과
1) 자신을 비우는 것은 인간의 억지스런 결심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참된 관상이라면, 자신을 비우는 것은 관상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이다.
2) 세상의 ‘비복음적인 상태’에 무관심해지지가 않는다.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도 해야 할 긴급한 갈증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우리가 사도직에 임하는 자세라야 한다. 즉 관상이 먼저, 그 관상의 결과가 사도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