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의 말씀

그분은 내가 하는 일보다 앞서 나 자신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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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NS 8 (준주성범 제4권 8장)
    날마다 거룩하고 흠 없는 제병으로서 자신을 봉헌하는 것!
당신의 작은 빠시옹의 이 의탁(abandon), 이것을 원하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그분은 내가 하는 일들보다 앞서 나 자신을 원하십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 거룩하신 뜻에 자신을 바치는 것. 무시무시한 봉헌! ...
    거룩하고 흠 없는 제병! 믿음으로 바쳐진 제물, 내 생애의 빛, 순명을 통한 내 번제의 빛. 희망으로 바쳐진 제물은 내 삶에 힘이 되는 온갖 형태의 가난이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바쳐진 제물은 내 희생에 동정의 향기를 풍기게 해줄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거룩하고 흠 없는 제병은 우리 주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참으로 봉헌될 것입니다. 나는 우리 회헌에 이러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리라 여깁니다.
    아무 조건도 없이, 조금의 늦춤도 없이 나는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제병이 머물고, 자신의 봉헌을 통해 지킬 곳은 특히 로마에서입니다. 내 성소를 완수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성공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 자신을 바치라 하십니다.
    우리 자매들의 관대함이 내 고통을 좀 덜어줄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께서 번제로 바치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분이 이런 방식으로, 혹은 저런 방식으로 이 번제를 행하신다고 하더라도 제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나 자신이지, 내 재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882년 8월 27일)

1) 준주성범 제4권 8장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제헌되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포기할 것. “주의 말씀: 나는 네 죄를 사하려 십자가 위에 내 손을 펴놓았고 네가 하느님의 엄벌을 면하게 하려고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아니하고 벌거숭이로 모든 것을 하느님 성부께 바쳤다. 이처럼 너도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해서 매일 미사성제를 드리는데 너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한 제물로 삼아 내게 바칠 것이다. 내가 네게 요구하는 것은 너 자신을 새롭게 내게 바치는 것 이외에 또 무엇이 있으랴. 네가 너를 포기해서 내게 너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것은 나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바치는 예물이 아닌 너 자신을 요구한다. ... 너는 네 자신을 내게 바치고 하느님을 위해서 네 전체를 하느님께 드리라. 그런 제헌을 나는 즐겨 받으리라. ... 나는 너를 위해서 나 전체를 성부께 바쳤고, 내가 네 것이 되고, 또 네가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내 몸과 피를 네 음식으로 내어주었다. 그러나 네가 자신에게 남겨두는 것이 있고 흔연히 내 뜻에 네 자신을 맡기지 않으며, 이런 제헌은 온전하지 못하고 우리 사이에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그리스도를 따라, 310쪽, 가톨릭출판사
  이 기도는 준주성범의 이 구절을 묵상(meditation)하던 마리 드 라 빠시옹이 어떻게 관상(oraison)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텍스트를 바탕으로 예수님의 봉헌과 자기 봉헌의 삶을 바라보던 이 관상은 언제나 그러하듯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자세로 모아진다.

2) 자신을 봉헌하는 것 :
  “자신을 봉헌한다.s'offrir" : 자신을 바치다(s'offrir), 의탁(abandon), 바쳐지다(immole), 번제(holocauste), 봉헌(immolation), 조건도, 늦춤도 없이 여기있나이다(ecce)라고 말하다 등등의,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가 무려 14번이나 반복된다. 이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이 글에서 자신을 봉헌하는 분은 무엇보다 먼저 거룩하고 흠 없는 제병, 즉 예수님이시다.
  이 예수께서 나에게 이 의탁,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예수), 그리고 거룩하신 뜻에 나를 바치기를 요구하신다. 예수께서 이렇게 원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존재를 원하시고, 내 온 존재가 하느님의 것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은 현실이므로, 겁도 난다. 그러나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될 때만 우리는 온전히 내적 자유를 지닌,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준주성범의, 위의 인용을 계속하면 이러하다. “네가 자유와 은총을 얻으려면 너 스스로 네 자신을 하느님 손에 맡겨야 함이 모든 일을 앞서야 한다. 사람들이 전혀 자신들을 포기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정신이 밝아지지 못하고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내 재능이나 일이 아니라 내 존재를 원하신다고 진정으로 확신하고, 그 존재를 드릴 줄 아는 사람은 내적 자유를 누린다. 이 내적 자유는 그러므로 인간에게 달려있지 않은, 예수님의 뜻에 달려있다.

3)  두 번째 단락을 알아보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내 생애와 내 번제의 빛인 신앙을 통해 바쳐진(그래서 순명과 연결되는) 거룩하고 흠 없는 제병(제물)
  내 삶의 힘인 희망을 통해 바쳐진(그래서 모든 형태의 가난과 연결되는) 거룩하고 흠 없는 제병
  내 봉헌의 향기인 사랑을 통해 바쳐진(그래서 동정성과 연결되는) 거룩하고 흠 없는 제물
  이렇게 됨으로써 거룩하고 흠 없는 제병은 우리 주님을 통해 하느님께 바치는 참된 봉헌이 될 것이다.(로마서12,1) 마리 드 라 빠시옹이 참된 봉헌에 대한 관상에 잠길 때, 그는 이러한 생각들이 회헌에 표현되어 있음을 떠올리고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태도는 아무 조건도, 조금의 늦춤도 없이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요약된다.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으면서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내적 자유에로의 길을 열어준다. 이러한 태도가 오늘날 우리 회헌 2항에서 “전적인 사랑의 순응성”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그 자세이다.

4) ...로마에서입니다. : 1882년 8월이면, 아직은 모든 일이 잘 되어갈 때이고, 몇 개월 후 자신에게 닥쳐올 시련을 짐작도 못할 때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 로마에서 자신의 봉헌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어떤 예감이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일이나, 능력, 자매들의 지지 등 그 어느 것도 자기 자신의 희생제를 대치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절절히 느끼고 있다.

5) 우리 영적 여정에서 내가 가진 능력에서 내 존재로 돌아가는 것은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구약에서의 희생이 의식에 더 초점을 두었다면, 신약에서 이 봉헌은 봉헌되는 이에게 더 초점을 둔, 존재적 희생제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