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의 말씀

그분 사랑에 의지한 채 하느님께 드린 단 일초가...

작성자 수녀회 조회조회 4,302

본문

NS 27
나는 다시 요한이 마리아에게 있어 예수님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에게 있어 바로 하느님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는 머리를 숙입니다.
나는 마리아와의 일치를 누렸습니다만, 이것에 대해서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께서 조배하시는 동안 그분을 덮은 하느님의 그늘이 나를 감싼 것 같았습니다! 그분 사랑께 그렇게까지 의지한 채 하느님께 드린 단 일초가 그분께 엄청난 영광을 드리고 땅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은총 앞에서 순수하게 자신을 낮추는 한 피조물을 감싸주는,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피조물은 이러한 은총에 합당하지 않으나 그 사랑에 대하여 피조물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리만큼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1883년 1월 29일)

 마리 드 라 빠시옹은,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긴 후, 마리아는 요한에게 순명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마리아의, 요한에 대한 순명은 물론 예수님의 대리자에 대한 순명이었다. 그런데 마리아는 요셉에게서 하느님의 대리자를 보면서 순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여기에서 순명의 기본 자세를 읽어낸다. 즉 인간적 대리자에게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보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모든 상황이 어둡게만 흘러가는 이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베르나르디노 신부님과 라파엘 신부님에게서 같은 순명의 대상을 발견하고 있는지 모른다.

 기도 중에 마리 드 라 빠시옹은 다시 한 번 마리아와의 일치를 경험한다. 이 경험이 관상 중에 일어난 신비체험인 것은, “이것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로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조배하는 마리아를 뒤덮은 하느님의 그늘이 자신을 휘감는 듯 느낌이다. 이렇게 성모님과 같은 자세로, 하느님의 그늘(구약에서 흔히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 성모영보 때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령이 마리아를 덮어주셨는데, 같은, 성령의 현존을 말한다.)에 휘감겨서 드리는 조배는 그것이 단 1초에 불과하더라도 이 세상을 위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깨닫는다. 이 조배야말로 참다운 조배인데, 잠깐이라도 하느님 사랑에 완전히 의존하여, 하느님께 인도되어 하느님을 경배하는 상태이다. 이같은 자세는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땅에는 소중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 조배가 가능했던 것은 마리 드 라 빠시옹이 기도의 시작에서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에 머리를 숙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조배는, 즉 한 인간이 하느님 사랑에 완전히 의존하여, 하느님께 인도되도록 자신을 내맡기고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영성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순전히 거저 받을 수 있는, 선물이요 은총이다. 그런데 이 은총은 오직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 맡기고(순종으로 머리를 숙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라야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은총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은총에 대해 감사의 마음이 넘쳐나서,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이것이 요한 복음 4, 23절에서 말하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다운 예배”가 아닐까 싶다. 이같은 조배는 그 자체로서 사람을 변화시킨다. 모든 은총의 작용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훗날 창립자가 조배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성소의 날인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한 행위로서의 조배를 말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느님 앞에서 한 인간의 존재 양식에 관한 것임을 그 자신 이렇게 관상 중에 체험하였기에, 그것을 자매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것이 아닐까?
  외적인 상황과 마리 드 라 빠시옹의 기도가 어떻게 대비되는 지를 함께 보자. 상황은 악화되고 있는데, 마리 드 라 빠시옹은 그 상황을 어떠한 신앙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그의 관상을 어떤 경지에까지 이끌고 갔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관련 성경구절 : 루카 1,35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출애 40,35 : 당신 백성 가운데서 계신 하느님의 힘있는 현존을 의미한다.)
  요한 4,21-24 :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성령의 은총은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알게 해주고, 경배하게 해준다. 이것이 참된 예배이다. 이러한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외적이고 전례적인 예배를 초월하는 것으로, 예수의 오심으로 가능해진 참된 예배이다.-TOB)
  요한 12,1 :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십시오.(‘여러분의 몸’이란 우리 존재 전체를 의미한다. 즉 존재 자체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로 바치라는 말이다. 하느님께 합당한 예배는 우리 존재 자체를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조배 성소와 제물 성소가 따로 떨어진 두 개의 현실이 아님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