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시선 아래...
본문
NS 29
“주님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라는 말씀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시선아래에서 아주 좋았으며, 저의 묵상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1883년 2월1일)
“보십시오, 주님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는 사랑과 신앙의 자세이다. 삼위일체께서 마리 드 라 빠시옹 안에서 아름다움을
바라보시고, 당신 현존으로 덮어주셨다면, 마리 드 라 빠시옹은 그 삼위일체의 시선 아래 머물면서 사랑과 신앙의 자세로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말씀드린다.
하느님의 시선 아래 머물러서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고 한다. “그냥 거기에 머무르는 것” 마리 드 라 빠시옹의 기도가
단순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혼의 성”에서 성녀 대 데레사가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기도하는 영혼은 넷째 궁방에서 “고요의
기도”에 들어간다. 이때 사람은 주입관상을 체험하게 된다. 인간의 생각에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는
인간의 노력에서 주님과 쉽게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관계가 쉬워진다. 단순함의 기도, 혹은 거둠의 기도, 단순히
생각하는 기도라고도 부르는데, 생각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느려지다가 멈추게 된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행위가 이제 주님께
다다르는 단순한 행위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제 더 이상 기도 중에 이런 저런 것들로 분주하지 않다. 고요의 기도라 해서 반드시
고요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무미건조함 때문에, 어둠 때문에, 마음과 의지의 지나친 활동 때문에 안절부절하지 못할 때도 있다.
혹시 빈 것같은 나른함을 느낄 지도 모른다. 분심이 들기도 한다.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지만, 주님의 현존 앞에 바보처럼 멍청하고
가난하게 머물러 있는 것 외에 무엇을 하려들면 불편해진다. 이제 주님이 어둔 밤의 수동적 부분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수동적
정화, 신앙의 정화는 이 넷째 궁방의 기도에서 이루어진다. 그분께서 인간 안에서 비밀리에 일하시면서 기도에서의 만족감에 나의
생각과 느낌에 의존하려는 경향에서 인간을 비워주신다. 이러한 정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수동적’이라 부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이 무엇을 하시는지 전혀 느낄 수 없지만, 그분이 무엇인가를 하신다는 것, 그분의 도우심으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력함 속에서 그분이 무엇인가를 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다.
이 시기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오상회와 같은 특권을, 즉 작은형제회 총장에게 직접 지도를 받는 특권을 본회를 위해서도 받고 싶었다. 베르나르디노 신부님은 좋은 생각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답을 보냈다.
NS 30
마리아의 가슴을 큰 칼이 꿰뚫었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더 그분께서는 이 지상에서 하늘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그러한 삶을 살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땅과 대적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사랑 자체를 모셔왔으니, 그분께 대항한
지옥의 전투가 어떠했겠습니까!(1883년 2월 2일)
마리 드 라 빠시옹은 또 다시 마리아와 일치함으로써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애쓴다. 마리아가 천상의 삶을 살면
살수록, 예수님을 이 땅에 모셔오면 올수록 지상에서 당하는 어려움은 컸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마리아처럼 이
지상에 사랑을 모셔오기 위한 결과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이 자신의 고통을 꿋꿋이 견뎌내도록 해주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