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우리는 자애심의 소멸을 통해 무한하게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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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 35
아름다움, 무한한 진리는 사랑인 듯합니다. 이 사랑의 영상(映像:la vue)은 성자, 그리고 성령은 사랑, 혹은 이
사랑의 빛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어떻게 말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사랑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유한한 우리는 자애심의 소멸을 통해 어느 정도 무한하게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그분의 일치,
그분의 빛이 우리 영혼 위에 내리쬐며, 영혼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영혼 안에서 우리가 작아질수록, 그 안에서 그분은 커지십니다.
바로 이 때 사랑하는 성프란치스코께서 내 가까이에 오셨습니다. 내 영혼은 바로 그분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
만일 신부님께서 내가 얼마나 사부님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아신다면... 또 얼마나 내가
사부님과, 그분의 사랑하는 가난 부인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지 아시기만 한다면...
조배 때 나는 아침 묵상에 대한 기억 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아침 묵상 때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프란치스코에 대한
사랑이 나를 삼키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몇 시간이고 그렇게 머무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1883년 2월 9일)
1) 마리 드 라 빠시옹이 관상한 하느님의 속성-아름다움, 무한한 진리, 사랑, 빛, 일치.
성자- 이 사랑의 영상 성령 - 사랑, 혹은 이 사랑의 빛
성부, 성자, 성령을 따로 관상한다 하더라도 항상 셋은 함께 등장한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의 영성의 근본이
삼위일체임이 잘 드러난다. “이 사랑의 사랑”을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보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다.
2) 우리 인간은 유한하다. 그러나 자애심을 없애면 우리 영혼에 사랑이신 하느님, 그분의 일치와 빛이 빛나게 하시고,
당신을 비추어주시므로 우리 역시 무한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아우구스티노적 영성이 프란치스코 영성과 만난다. 즉 가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가 영혼에 투영되는 것을 확신하므로, 이것을 맛보는 인간은 가난을 갈망하는 것이다. 가난은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것이 프란치스코의 딸이 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3) 어제에 이어, 묵상 때의 관상이 조배 때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일상생활이 묵상과 조배를 두 축으로 하여 연속성있게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계속 위안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