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의 말씀

모든 것이 진리 안에서 하나이며...

작성자 수녀회 조회조회 4,787

본문

NS 36
    교만은 진리이신 분을 거역하는 거짓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부께 반대하는 죄악입니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 잘못된 자기 인식, 잘못된 시각, 거짓 지혜, 이 모든 것들은 성자께 대한 모욕이며, 그러므로 자애심은 성령께 대한 모욕입니다.
    모든 것이 진리 안에서는 하나이며 모든 것이 근본으로 모아지며 모든 것이 존재 자체이신 분께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바로 이것이 도둑인 나를 비우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내게 이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여겨지는지요! 오, 신부님, 우리가 만일 존재 자체이신 분의 감실이자, 겉봉투에 불과하다면요?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내 안에 사는 것이 더 이상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사부 성프란치스코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어린양을 다시 쓰다듬어 주시고 나에게 너무나 현란한 모습으로 가난에 대한 당신의 열정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의 비움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존재이신 분의 참된 감실에게 있어 가난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프란치스코가 사시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 비움의 정도가 하도 커서 그 힘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상처가 그분에게 나타날 정도였습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내가 이 찬란한 신비의 조화를 보는 것처럼 신부님께도 보여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이것을 감히 거의 “단순하다”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부 성프란치스코께서 거기에 너무나 가까이 계셨습니다.
      이것은 미사 중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내 세라픽 사부의 사랑이 순명과 가난에 대해 내가 어느 정도의 사랑을 품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를 산토 밤비노(Santo Bambino)의 성소에 데리고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명에 있어 아기(Bambina:밤비나)와 같이 되어야 함을, 사제의 손에 들린 제병이 되신 산토 밤비노처럼 되기까지 절대로 멈추어서는 안 되는, 그런 아기가 되어야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1883년 2월 10일)

1) 첫째 단락 : 교만과 과대평가, 자애심이라는 악까지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다.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 성부는 진리와, 성자는 지식, 시각, 지혜와 연관되며, 성령은 사랑과 연관된다. 이 기도에서 하느님은 여러 다양한 호칭으로 드러난다. 성부, 근본, 하느님, 좋으신 하느님, 성자, 지식, 시각, 지혜, 예수 그리스도, 산토 밤비노, 제병, 그리고 성령도 나온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하느님을 부르든,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 있어 “모든 것은 진리 안에 하나이며, 모든 것이 우리를 근본에로 데려간다.” 관상 중에 삼위일체의 이 다양성과 일치에 감탄하고 놀라워한다. “얼마나 아름답게 여기는지요!” “찬란한 신비의 조화” “단순하다” 등등이 모두 그 표현이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이 본회의 일치를 그토록 강조한 것은, 그러므로 단순히 전교수도회로서의 효율성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에게 일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반영이요, 따라서 본회의 일치는 그 자체가 이 세상에 그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여주는 표징이기도 하다.

2) 나를 비우는 것이 필요한 이유 : 모든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있고, 모든 것이 근본이신 하느님, 존재 자체이신 분께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을 볼수록, 삼위일체에 일치하고 참여할수록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를 느낀다. 그러기에 이 비움은 고통이 아니라 “너무나 아름답게” 여겨진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 기도에 나타나는 비움의 동기는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에서 비롯한다. 비움은 인간이 존재 자체이신 분의 감실이나 겉봉투가 되는 것인 동시에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을 벗어버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 일치와 이탈은 같은 현실의, 두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비운 결과는 무엇인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일치이다. 여기에서 가난은 이 비움의 외적인 표시 외에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이 비움은 사제의 손에 들린 한낱 제병이 되기까지 가야한다.
    나를 ‘도둑’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난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한다면 도둑은 하느님의 것을 내것인양 소유하는 태도이다. (성프란치스코의 권고 참조.)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자신을 도둑, 프란치스코의 어린양, 어린아기로 지칭하고 있는데, 모두 가난과 비움의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3)  존재 자체이신 분의 감실, 봉투라는 말은 모두 겉만 자신이고, 내용은 하느님으로 가득 찬다는, 즉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라 2,20)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로, 하느님의 아들과 일치를 이루는 삶을 가리킨다. 이 삶은 내 관심사를 만족시키려는 육적인 삶이 아니다. 육적인 나는 죽었다. 물론 아직은 인간의 죽을 조건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그들의 신앙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 세상에서 벌써 누린다. 이렇게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이 거저 주시는 구원과 사랑에로 인간을 열어준다. - TOB

4) 존재이신 분의 참된 감실에 있어 가난은 필연적 :  하느님과 일치한 이에게는 필연적으로 자기 비움에 대한 갈망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비움은 일치의 결과이다. 하느님과의 일치-비움 - 가난 - 오상은 모두 같은 사건의 여러 측면이다.

5) 단순하다 : 성프란치스코에게서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신비를 관상하는데, 이 ‘찬란한’ 신비의 조화를 감히 ‘단순하다’고 말한다. 실상, 신비를 관상하는 이에게 그것은 너무나 명약관화한 진리이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지금 관상에 빠져 그 아름다움을 누리고 있다.

6) 미사 중에도 계속되다 :  이 며칠 동안 계속 그러하듯 마리 드 라 빠시옹의 관상은 기도 시간으로만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미사 중에, 성체가 축성되어 사제의 손에서 높이 들리는 것을 보면서도 이어진다. 그에게 성체는 자신을 비우신 케노시스의 신비와 아기 예수님의 순종을 떠올리게 해주고, 자신 또한 순명을 통해 자신을 비우라는 초대로 다가온다. 예수님의 케노시스와 같이, 이 비움의 행위는 늘 계속되어야 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