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의 말씀

참된 힘, 그것은 하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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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NS 46
참된 힘, 그것은 하느님입니다. 지상에서 어떤 힘이 진리와 애덕일수록 그는 참된 힘입니다. 이 아름다운 삼위일체의 품속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참된 힘, 즉 진리와 애덕이신 하느님으로 온통 채워져 다시 나오게 됩니다. (제가 본 것에 따른다면) 내가 세상에 참된 힘을 전달해줄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전체를 하느님께 드리게 되리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진리와 사랑에 반대하는 힘이 참된 힘을 퍼뜨리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이 방해만 없다면 진리와 사랑은 저절로 퍼져갈 텐데요. 참된 힘을 전파하는 데에는 항상 장애가 있기 마련인데, 사실 장애물만 없다면 사랑과 진리의 나라는 스스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를 책망하는 “만일 너희가 내가 누구인지를 믿지 않는다면 너희는 너희의 죄 속에서 죽게 되리라(요한 8,24).”는 말씀은 나만이 아니라 진리와 애덕에도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였으며, 그 결과, 스스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내가(진리와 애덕) 누구인지를 믿지 않는다면 너희는 너희의 죄 속에서 죽게 되리라. 이때 성프란치스코는 꼬르드를 울리게 했다고 하신 우리 할아버지의 말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작은형제회가 이 말씀을 언제까지나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밤비노께서 내가 아라첼리에서 이 꼬르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것은 참으로 위안을 주는 빛입니다. 꼬르드는 오직 하나, 복음 밖에 없습니다. 꼬르드는 진리의 애덕이요, 애덕의 진리, 하느님 자신의 진동(vibration) 입니다. 만일 신부님들이 이 복음의 진동을 울려 퍼지게 하지 않는다면 신부님들은 죄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성프란치스코의 힘, 그것은 참된 힘입니다. (1883년 2월 19일)

아니라 진리와 애덕에도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였으며, 그 결과, 스스로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내가(진리와 애덕) 누구인지를 믿지 않는다면 너희는 너희의 죄 속에서 죽게 되리라. 이때 성프란치스코는 꼬르드(‘corde’라는 불어 단어는 악기의 줄, 현(絃)이기도, 띠이기도 함)를 울리게 했다고 하신 우리 그랑뻬르의 말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작은형제회가 이 말씀을 언제까지나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밤비노께서(아라첼리의 아기 예수님 동상) 내가 아라첼리에서 이 꼬르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것은 참으로 위안을 주는 빛입니다. 꼬르드는 오직 하나, 복음 밖에 없습니다. 꼬르드은 진리의 애덕이요, 애덕의 진리, 하느님 자신의 진동입니다. 만일 신부님들이 이 복음의 진동을(vibration)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지 않는다면 신부님들은 죄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성프란치스코의 힘, 그것은 참된 힘입니다. (1883년 2월 19일) 

1) 이 글에는 세 가지 종류의 힘이 구별되어 나타난다.
참된 힘과 중립적인 어떤 힘, 그리고 참된 힘에 반대하는 힘이 그것이다.
참된 힘은 하느님이요, 아름다운 삼위일체이시다. 만일 장애가 없다면 참된 힘은 스스로 울려 퍼지고 스스로 확장되어 가는 힘이 있다. 참된 힘의 나라, 즉 애덕과 진리의 나라도 그러하다. 이 힘이야말로 복음이요, 애덕과 진리요, 하느님 자신의 진동이요, 성프란치스코가 지니셨던 그 힘이다. 인간은 삼위일체의 품속에 잠겼을 때 이 참된 힘을 덧입고 참된 힘으로 채워질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이 참된 힘을 세상에 전해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곧 주님께 세상 전부를 돌려드리는 것일 터이다.
중립적인 힘은 “어떤 힘”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힘이 진리와 애덕에 가까울 수도, 그 반대로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반대되는 힘은 진리와 애덕에 거스르는 힘이다. 이는 참된 힘이 전파되는 것을 가로막고, 그 결과로 애덕과 진리의 나라, 즉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가로막는다. 이 힘에 의존하는 사람은 복음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대로 이용하는데, 그 결과, 스스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너희가 죄 중에 죽게 되리라” 혹은 “믿지 않는 자체로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참된 힘이 스스로 퍼져 나가고 애덕과 진리의 나라가 건설될 것이라는 통찰은 놀랍도록 긍정적이고, 확고하다.

 2) TOB -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오직 신앙 안에서 예수를 알아뵙는 데에 달렸다. 예수님은 이 복음에서(8,24)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말로써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어쩌면 예수님은 빵과 빛이라는 이미지로 드러나는 인간의 구원자로서의 자신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잘 알려진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이사 43,10; 41,4;46,4;48,12;신명 32,39)
    ex) 이사야 43,10-11: “나 이전에 신이 만들어진 일이 없고 나 이후에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내가, 바로 내가 주님이다. 나 말고는 구원해 주는 이가 없다.”
    또 어쩌면 시나이산에서의 계시(출애 3,14-16)를 연상할 수도 있겠다. 어떤 경우이든 예수님의 신적 신원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근거하며, 따라서 그분은 하느님의 계획에 절대적으로 충실하고 신실하신 분이다.

3)  창립자가 얼마나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인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창립자는 오해의 와중에, 그것도 교회의 수장으로부터 오는 오해를 받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지, 그러면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진실을 확신하고 있다. “당신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즉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죄 중에 죽게 되리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확신이 아닌가! 거기다 이 묵상에서 그는 이것이 비단 자기 개인에 대한 음해일뿐 아니라 진리와 애덕에 대한, 즉 복음에 대한 음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받는 음해가 참된 힘을 퍼뜨리려는 과정에서 만나는 장애임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선언이다. 시련동안 주위를 놀라게 했던 놀라운 평정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잘 보여준다.

4) 처음엔 자신에 대한 음해에서, 진리와 애덕에 대한 음해로, 더 나아가 이제 진리와 애덕을 울려 퍼지게 하지 않는 것 자체도 죄라고 말하고 있다. 진리와 애덕 자체가 하느님의 진동이므로 신자들이, 특히 작은형제들이 이 복음의 진동을 세상에 울리지 않는다면 그것도 죄라고 누구도 아닌 작은형제에게 말하는 이 대담성이 놀랍지 아니한가! “내가 누구인지를 믿지 않는다면”을 “이 복음의 진동을 울리지 않는다면”으로 살짝 바꿈으로서 그는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복음의 진동을 울리는 것, 즉 삶으로 복음의 향기를 퍼뜨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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