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의 말씀

NS 106 세례 때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성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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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 106
세례 때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성심.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아름다운 빛 한 줄기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은 굴욕 받으시고 비하되기까지 자신을 내어놓으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가셨다.” …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성보나벤투라와 성베르나르도에 의하면 정의는 겸손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그걸 보았으므로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죄란 피조물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느라고 자신의 목적인 하느님과 사랑에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완전한 정의란(참으로 깊고도 참된 이 말에 유의하십시오) 피조물이 자신을 비우고 자신에게서 눈을 떼어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바라보도록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실현된 정의, 자신을 비하하기까지 하는 정의는 신적인 존재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했습니다! 신부님, 본 것을 이렇게 쓰자니 몸까지 떨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자애심을 짊어지시고 당신이 모든 형제들을 위하여 스스로 세례를 받고, 씻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신부님, 또 이런 광경도 봤는데, 정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마자 그에게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과연 예수님을 위해 열렸을까요? 언제 예수님께 하늘이 닫힌 때가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 하늘이 열린 것은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신부님, 이 글을 쓰며 저는 사랑이 비둘기 모양으로 지상에 내려오시는 것을 봅니다! 성부께서 말씀하셨고 성자께서 거기에 계시며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이제는 원죄가 인간을 하늘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형제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 분”이시므로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신부님,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시고 나의 이기심을 없애시기 위해 겸손되이 당신을 낮추셔서, 이 겸손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늘이 열림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이 황홀한 빛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 비천한 몸을 너무나도 행복하게 해줍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때 “내가 너를 비추지 않았더라면 땅의 작은 벌레 같은 네가 학자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겠느냐?”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예수님이라기보다 하느님이신 것 같았습니다. (1883년 8월 17일)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아름다운 한 빛”이, 즉 기도 중에 관상한 바가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는 “떨린다”, “행복하다”, “충격을 받았다”, 등등의 감정을 드러내는 동사와 형용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이 기도 중에 본 것을 다 표현하는데 한계를 느낀다 하더라도(“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반응을 알 수 있는 글에 줄을 치거나 따로 써 본다면 마리 드 라 빠시옹과 같은 체험 안으로 들어가는데 조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리 드 라 빠시옹이 이 기도 중에 무엇을 보았는가?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통해서 하느님의 하느님성이 바로 완전한 정의와 겸손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성베르나르도와 성보나벤투라가 겸손과 정의가 같다는 말을 했다면, 그것을 이 기도 중에 마리 드 라 빠시옹 역시 깨닫고, 다음 단락에서 그것을 설명하고자 애쓴다. 말하자면 이 기도 중에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성령의 빛으로 지성적인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이다. 라파엘 신부님은 훗날 마리 드 라 빠시옹이 이 지식의 은사를 받았다고 토로하는데, 이 기도에서 우리는 그 예를 본다.

둘째 단락에서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정의가 왜 겸손과 같은지를 설명한다. 그에게 죄란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다. 반대로 정의란 인간의 원래 목적인 하느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자신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겸손의 의미인 것이다. ‘바라본다’는 말은 그러므로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 단순히 시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디를 향해 있는가 하는 말이다. ‘나’를 바라보면 죄이고 ‘하느님’을 바라보면 그것이 정의이자 겸손이다. 그런데 완전히 자신에게서 떠나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이, 그래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낮출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바로 신적인 존재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만이 그토록 자신을 비우고 상대를 향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은 예수님의 세례에서 그 완전한 자기비움과 완전한 이타성을 알아보고, 거기서 신성을 발견한다. 성서적 의미에서 하느님의 정의로움이 인간과의 계약을 끝까지 지키고 완수하시는 당신 충실성을 의미한다고 할 때, 하느님의 정의가 구세사 안에서 이러한 겸손과 자기비하로 드러남은 당연하다. 

다음 단락에 나오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 장면이다. 여기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께서 드러나시고 그 계시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은 원죄에서 씻어지고(세례), 예수님의 형제자매, 성부의 아들딸이 된다. 예수님은 죄와, 나 자신의 자아를 없애주시고 하늘이 인간에게 다시 열렸다. 이것이 세례성사의 의미가 아니던가!

마지막 단락은 이 기도 중에 받은 빛이 마리 드 라 빠시옹에게 미친 결과이다. 이 단락은 친밀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마리 드 라 빠시옹은 받은 빛으로 행복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은총임을 명확히 인식한다. 기도 중의 체험이 그를 더욱 더 하느님께 감사하고, 의지하게 만들고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그러나 은총으로 채워져 있음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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