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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 그리운 오야마 수녀님 > 이종한 요한 신부. 작은형제회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9-12-02 조회조회 9,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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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7일 선종하신 오야마 데레사 수녀님의 삶을 기억하며 프란치스칸으로서, 선교사로서의 수녀님의 삶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쓰신 작은형제회 이종한 요한 신부님의 글을 이곳에 나눕니다.



< 그리운 오야마 데레사 수녀님 >          

                                  

                                         - 이종한 요한 신부. 작은형제회 -

  올해 산청 성심원이 개원 60주년을 기념했다.
  1957년 우리나라의 여러 현실은 열악했기에 , 사회 사업 수준역시 어느 분야 보다 더 열악했다. 먹고 살기가 편치 않으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자연히 가장 열악한 삶을 꾸려야 하는 한센인들은 관심 밖의 사람이 되어 구약 성서 수준의 대접을 받을 때였다. 이때 이태리 제노바 관구의 형제들이 인근 개신교 시설에서 갖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 환우들이 자기들 끼리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시설을 청하기에 제노바 형제들은 기꺼이 시원히 응해  산청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런 시설을 시작한다는 것은 자체 계획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한센병에 대한 주위의 반대와 편견이라는 인간적인 문제에 더 부딪쳐야 했다. 경호강이 흐르는 산청은 유림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자기들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지역이라  요즘 표현으로 혐오시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에 갖은 방해를 다했다. 제일 어려운 것은 당시 치안수준이 열악했기에 이 공사가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낮에 열심히 해놓은 건축 공사를 밤이면 이웃 사람들이 와서 파괴하는 통에 이 외국인들은 망연자실이 되었다. 경찰력이 약한 곳이라 무법천지의 양상을 띄고 있는 곳에서 시설을 설립하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기에 당시 책임자인 주 콘스탄죠 신부님은 엽총을 구입했다. 동네 사람들이 들어닥치면 엽총으로,로 공포를 쏘니 이웃 주민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이 합법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처지에서 비록 공포나마 그 총부리가 자기들을 겨눌 수 있다는 공포감에 줄행랑을 치고 나면 공사를 진행해서 환우들을 모시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곳에서의 수도생활은 번드레한 말이나 이론만으로 되는게 아니라 대단히 진취적인 도전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를 시작한 제노바 형제들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진취적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제노바는 해양 국가로서 해적질도 많이 했지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고향 답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과 추진력에 있어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성프란치스코가 자신의 회개체험에서 언급한 한센병 환우들은 순수한 프란치스칸에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만남으로 여겨졌기에 제노바의 내노라 하는 집안 출신의 형제들도 합류하면서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인간적인 시각으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시작했다. 참으로 제노바 형제들의 진취적인 의욕이 없이 사업의 가능성을 수판알로 따지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시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설이 어느 정도 완공되고 나니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의료 인력이었다. 상주의사를 모신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환경에서 간호사의 역할은 절대적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이 땅에 진출한지 얼마 되지 않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에서 맡게 되었다.
  이 수녀회는 1877년 프랑스 출신의 복녀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에 의해 인도에서 창설되었으며 프란치스칸 정신을 더 철저히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도회이며 수도회 역사상 짧은 시간에 양적으로 질적으로 착실히 성장한 수도회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58년에 진출하여 1960년 부산 양정에 수녀원을 신축하면서 부산과 서울에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의원을 설립할 만큼 가난한 사람들과 파부적인 접촉으로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도회 이다.

  오야마 수녀님은 새로 시작된 성심원에 간호 수녀로 오셨다. 수녀님은 수녀원 입회 전 중국에서 간호장교로 일하면서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에게 하는 악행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파 속죄하는 마음으로 우리나라를 찾게 되었다. 항상 가해자는 자기들의 악행을 잊기 쉬우나 피해자는 대물림을 하면서 그 악행을 기억하기에 중국에서 자기 동족의 악행을 본 수녀님에게는 일본에 있어 중국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한국에 온다는 것은 세상 표현으로 하면 죽을 맛이었을 것이나 수녀님은 자원으로 기쁘게 오셨다. 수녀님은 이런 것을 감내할 영적인 준비가 완료된 여장부이셨다. 보통 수도자들도 원력이 부족한 사람은 철저한 준비라는 것이 조그만 위험에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자기 방어를 철저성으로 생각하고 처신하는 쪼무래기 기질이 신중성으로 위장되기도 하지만 수녀님은 여장부셨다. 그분은 젊은 수녀 시절 일본 히로시마에 있을 때, 성 이냐시오 이후 가장 휼륭한 예수회 총장으로 평가되던 야루페 신부님의 지도를 받아 착하지만 심약한 수녀가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증거하기 위해선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산청에 왔다.

  처음 시작된 산청은 여러 곳으로부터 가톨릭 신자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병 때문에 받는 사회적 편견에 의해 많은 상처를 받아 민감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수녀님은 한국인들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게 만든 일본인이라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산청에 오시자 자발적으로 먼저 창씨 개명을 하셨다. 창씨개명은 먼저 일본인들이 한국인의 넋을 말살하기 위한 원초적 조치로 강제 실시한 것인데, 수녀님은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산청 오씨로 했다. 산청 환우들의 어리둥절한 가운데서 수녀님은 자신이 창씨개명만이 아닌 자기 삶이 바로 산청 오씨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자 환우들은 자연스럽게 산청 오씨를 수도자이기 이전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어머니 누나 언니 친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얼마 후 수녀님님은 성심원의 인기 스타가 되었다. 아이들은 수녀님을 만나면 마술피리에 몰린 어린이들처럼 수녀님 뒤를 졸졸 따르기 시작했다. 환우들은 누님이나 어머니, 자매처럼 수녀님을 대하기 시작했다. 수녀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마을 형제들은 수녀님이 혹시 외출이라고 할 양이면 언제 귀원하는지 용건이 무었인지? 찌라시 수주의 소문이 아니라 수녀님에 대한 애정의 표현으로서의 밝은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기 시작했다. 병원 마음에 간호 수녀의 역할을 중요하기 마련이나 , 수녀님의 행동은 마음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수녀님의 존재성이 움직이는 감실 처럼 환우들 전체의 어머니처럼, 성심원을 가정 공동체의 성격으로 변화시켰다. 성심원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들이 많았으나 빠른 정착을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산청 오씨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했던 수녀님의 역할이 대단했다.

  그 후 수녀님은 진주 양로원에서 일하셨다. 이 시기 본인도 관구에서 일했기에 수녀님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양로원은 성심원과 달리 노인들을 알뜰히 보살피면 되는 몸은 피곤하나 마음은 단순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는데,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신 수녀님께서는 이런 정서에 맞게 양로원의 성격을 잘 정착시키셨다.
  양로원은 성심원과 달라 비슷한 연령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요구사항도 비슷했지만 수녀님은 그들의 요구를 최선을 다해 도와줌으로써 노인들에게 결핍되기 쉬웠던 누군가 자기를 최선을 다해 돌보고 있다는 안도감에 양로원의 분위기가 어느 품격 있는 가정집 노인의 분위기를 바뀌었다. 언젠가 정확히 그 시기를 기억 못하지만 진주 양로원이 전국 노인 시설 평가에서 2등을 차지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시설의 관점이 아닌 노인들을 모시는 인격적 관점에서 평가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 부터인가 노인 요양 시설에서 노인들을 “어르신”으로 부르는데, 수녀님이 있을 때 이런 명칭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수녀님은 온몸으로 그들을 어르신으로 모심으로 양로원 분위기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인간적이며 밝은 공간으로 변했다. “잔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식사나 생활환경 어디에도 불편을 느낄 수 있는 노인들이 사는 곳에선 체념성 불만이 있게 마련이고 이것은 생활의 사소한 부분에서도 불평과 짜증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 양로원을 달랐다. 수녀님의 마음을 읽는 노인들이 생기면서 이들이 양로원의 분위기를 시설이 아니라 품격 있는 노인들이 모인 가정으로 바뀌었다.

  입에 발린 감사가 아니라 진정으로 느끼는 감사를 사는 노인들이 모인 아름다운 가정이었으며 더 상쾌한 것은 노인들 중 충고나 교정이 필요한 사람이 생기면 행정 조치를 하기 전에 노인들 중에 자발적으로 그를 충고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정상적인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자체정화의 조직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요, 수녀님의 프란치스칸 수녀로서 복음에 바탕을 둔 섬김의 결실이라 여긴다. 이런 면에서 수녀님은  양로원 운영 지침을 복음으로 해서 이것을 구호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혜롭게 실천함으로서 진주 사회에서 모범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다.

  가깝고 먼 나라라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일본인의 생활 습관에서 우리와 전혀 다른게 있는데 어법으로 표현되는  혼네와 다테마에(本音と建前)이다. 이것은 우리와 다른 일본인 심성 이해에 중요한 단어로, 개인의 본심과 사회적인 규범에 의거한 의견을 구분해서 나타내는 말이다. 흔히 본심과 배려, 속마음과 겉마음으로 불리며 일본인의 경우 자기 의견을 피력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를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몸에 베어 익숙하다. 한마디로 일본인들은 항상 자기의 발언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어선 안된다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니 모든 것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시각에선 이중성의 표현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일본인의 심성 즉 어떤 경우에든 남에게 폐를 끼쳐선 안된단 생각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오야마 수녀님은 일본인으로서 드물게 한국인처럼 혼네를 사용해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지만 자기의 뜻을 정확히 밝혔다는 면에서 참으로 시원한 성격의 일본인이었다. 그분은 자신을 산청 오씨라고 불러 한국에 대한 친근감의 표현과 함께 언어 사용에 있어서 일본인으로선 너무 생경스러운 한국적 표현을 자유롭게 하셨다. 이것은 수녀님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천성의 결실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이 나와의 관계에서는 불편으로 다가왔다. 수녀님이 양로원에 계실 때 관구의 일을 하는 나에겐 수녀님을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 양로원의 현실에 좀 문제되는 것이 있었다.
  양로원에는 숫자는 많지 않지만 남자 노인, 즉 영감들이 있었고 이중에 몇 명은 기저귀를 차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 영감들의 기저귀를 수녀님이 손수 갈고 계셨다. 나는 새벽에 수녀님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 몹시 민망해서 양로원에 있는 우리 회원들이 했으면 하고 권했으나 수녀님의 생각은 달랐고 여기에 대한 것을 한국적인 표현으로 해서 나를 민망스럽게 만들었다. 기저귀를 가는 것은 매일 새벽에 해야 하는 일인데, 우리 회원 중에 그런 사람이 없으니 자기가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표현이 너무 단호하면서 수녀님을 그 일을 계속하셨다. 그러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당당한 자부심으로 하신 것이기에 어떤 불편한 심기를 보이는 일이 없었다. 이점에서 수녀님은 자기 의견을 소신껏 시원히 표시하며 사시는 분이시기에 심리적 변비증 환자에게 볼 수 있는 불편한 모습, 꼬인 모습은 볼 수 없고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하시면서도  나주 배처럼 시원시원하게 하셨다. 3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회원들의 수준은 아직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느끼며 부끄러움과 함께  수녀님의 시원하고 앞선 생각과 실천에  감사하게 된다.
  수도자들이 성의 표현을 너무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위축되기 쉽고 영감들의 기저귀 가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병자에 대한 큰 애정 표현이 아니라, 정결에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다보면 수녀님 같은 시원한 행동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면에서 수녀님은 수도자들이 뛰어 넘어야 할 정결의 대단한 예언적 태도를 보이섰다. 우리의 유치함을 정확히 지적하면서도 그분은 자신이 그것을 맡는 것으로 만족하며 충실히  하셨다.

  언제 부터인가 수녀님은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셨다. 몸으로 때우며 산 수도자에게 생길 수 있는  병이기에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과거 많은 수도자들은 선교지에서 인생을 마무리 하는 것을 신념으로 생각하나  수녀님은 다른 생각, 즉 선교지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때  더 이상 선교지에 짐이 되기 보다는 자기 관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예가 많은데, 수녀님도 이런 취지에 동참하면서 일본으로 복귀하셔서 도움이 필요한 환자 수도자로서의 삶을 사셨다.
 

  2017년은 한국 프란치스칸들의 진출 80주년을 지내게 되었다. 이런 때면 언제나 그렇듯 과거 회상과 미래에의 비젼을 제안하는 거창한 행사가 준비되게 마련이다. 다 필요한 일이고 좋은 지향으로 하는 것이지만 수도 공동체도 일반 세상 어떤 사회집단 못지않게 은성한 말장난으로 끝나는 행사가 많다는 것이 살아가면서 경험으로 느끼는 현실에서 수고한 선교사들을 찾아 보는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한국 관구의 성지와 같은 성심원에서 수고한 선교사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거리도 가까운 이웃 나라이니 더 적당하면서도 또 인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장상의 허락을 얻어 수녀님이 계시는 일본 남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인 후쿠오카를 방문했다. 관구 경리의 자상한 배려로 선물 준비를 당당히 할 수 있었으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병상에 누워계신 분에게 오래 머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실례라 생각하고 저녁에 도착해서 아침 미사를 드린 후 떠났다.
  수녀님을 만나면서 느낀 것 그분이 아직 우리말을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수준으로는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몸 전체로 말씀하시는 생활을 사시니 사실 언어의 필요성은 일반인들만큼 심각치 않고 나이 드셔셔 오셨으니 우리말이 그리 유창하지는 않으셨는데, 비록 몸은 떠났으나 마음으로  산청 오씨의 삶을 사신 탓인지 대화에는 불편이 없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영감들의 기저귀 까지 맡겼던 우리 수준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했는데, 수녀님은 그 말을 기억할 수도 없었고 또 나 역시 하기가 부끄러운 내용이라 빠른 말투로 모기 같은 소리로 했으니 수녀님이 알아들을리도 만무하지만 우리의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다른 두 수녀님들을 방문해야 했기에 떠나다 보니 마지막 종착지가 동경이 되면서 이스라엘 순례 안내를 끝내고 즉시 이어진 무리한 일정에 몸이 불편한 신호를 보냈다. 미련하게 준비한 일정에 귀국해서도 강의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는데, 건강 상태가 말씀이 아니었다. 며칠 후 진정되고 나니 일정을 처리하면서도 다녀오기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난 9월 수녀님이 99세의 연세로 귀천하셨단 부음을 들었다.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닌 아름다운 임종 소식을 들으며 다시 수녀님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분의 삶은 프란치스코 수도자로 살았기에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살면서도 너무도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복음의 향기를 풍기셨다. 우리는 보통 위의 단어를 사용하는데 너무 익숙해있기에 실재 삶에서의 감동은 그리 느끼지 못하고 형식적인 이해를 할 때가 많으나 수녀님의 삶은 되돌아 볼수록 아름다운 삶이다.
  그분의 업적에 대해 눈에 보이는 것으로 기재할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삶 자체가 복음이었으니 산청과 진주에 필요한 명강론을 하시면서 주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의 어머니로 누나 역할의 선교사의 삶을 사셨다. 거룩한 삶이라고 말하기에 어색한,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존재로서의 삶을 사셨다.
 

성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셨다.
 

“먼저 사랑하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사랑이 곧 복음의 핵심이기에 이 사랑의 실천에는 어떤 제약이나 군덕지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수녀님을 삶으로 실천하셨다. 산청과 진주에서 그분은 자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주면서도 본인 역시 이것을 만족히 하셨기에 항상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의 기쁨과 자유로움을 보이며 사셨다. 나는 이 수녀님 뿐 아니라, 오랫동안 여러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자매들을 대하면서 이런 장한 선교사의 삶이 그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DNA로 전수된 모습을 발견할 때 마다 다시 수녀님을 생각하게 된다. 큰 기둥 역할을 하던 인물들이 떠나고 나면 그 역할이 아쉬울 때 마다 그분을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 후배 수녀들은 그분의 역할을 새로운 환경에서 재현하는 것을 봄으로서 아름다운 감동이 그분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분이 산청 오씨로 뿌린 사랑의 민들레 홀씨는 후배 자매들안에서 피어나 그들이 다시 홀씨를 만들어 날림으로서 더 넓게 펴지고 있다.

  몇 년 전 동경 지하철에서 만취한 승객 하나가 철로 안으로 떨어진 것을 마침 이것을 본 우리 유학생이 구하고 그는 생명을 잃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요즘 우리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그런 극우파가 아니라 일본에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크게 보면서 여러 추모 행사를 준비했다. 추모 행사 중에는 그 학생을 돕기 위한 모금도 있었으나 유가족들은 그것을 모두 일본 학생들을 위해 사용함으로서 감동을 더하고 있다. 이수현이라는 학생의 장한 삶을 기린 영화가 제작되었을 때 지난번 일왕 아키히도도 관람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일깨웠다.

  여러 면에서 우리 성심원의 60년  역사는 참으로 대단한 보석들이 석류 알처럼 꽉 찬 멋진  인류 공동체의 하나이다. 단순히 사회사업을 하는 공동체가 아닌 사랑의 고귀함을 몸과 마음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공동체의 비참한 사연 보다 감동적인 사랑이 더 가슴을 저미는 햇빛 공동체이며 오야마 수녀님은 당신의 삶 전체를 던져 이 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하신 분이시다. 근래에 성심원의 미담이 메스콤을 통해 간혹 소개되고 있으나 수녀님의 삶은 이런 소개와 무관한 모습으로 민들레 씨앗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앉아 새로운 노란 꽃을 심어주고 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 확인이 허전하고 아쉬운 것이 아니라 , 그의 삶을 대신해서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수녀님에 대한 감동을 회상할 수 있는 것이 기쁨으로 다가온다.